전통문화의 거리 인사동. 이곳에 디자이너가 따로 찾는 한지 가게가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가게 이름은 동양한지. 옛날 인사동 모습부터 오늘날 한지의 쓰임새까지 과거와 오늘을 넘나들며 다양한 이야기를 기록할 수 있었다.
동양한지 박창완님 ⓒfrice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한지를 연구하고 만들고 판매하는 박창완입니다. 경기도 김포에 한지 소재연구소를 만들었는데요. 염색이나 후가공을 거친 특수한지를 다양하게 생산하고 있어요. 저는 한지의 현대적인 쓸모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렇게 작업한 한지들은 인사동 동양한지에서 판매하고 있어요. 부친을 도와 남동생과 한지 가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01. 왜 인사동에 한지 가게가 몰려있을까?
부친께서 인사동 한지 전문가로 유명한 박성만 선생님이시죠.
맞습니다. 저는 교육학을 공부했어요. 대학원에서는 한지가 아니라 학생 인권을 공부했었죠.(웃음) 인사동에서 한지 가게를 운영하시던 부친께서 한지 업계로 들어오라고 저를 설득하셨습니다. 한지의 가치를 높이고 맥을 이을 사람이 절실하다고요.
동양한지에 전시된 한지공예품 샘플과 판매중인 종이들 ⓒfrice
2009년부터 한지를 공부하기 시작했는데요, 이를 위해 미술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국내 한지 장인을 만나 사례 분석과 제작 기법을 정리할 수 있었죠. 대학원에서 했던 학술 연구는 큰 힘이 됐습니다. 지금은 문화재 복원용 한지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인사동 동양한지는 50년 넘게 운영중입니다. 언제 어떻게 시작됐나요?
전주에서 할아버님이 일제강점기 때 한지를 만들어 파셨고, 부친께서는 유통에 힘쓰셨어요. 부친은 1968년에 서울 인사동으로 들어와 1972년부터 한지 가게를 여셨죠. 동양한지라는 이름은 그때부터 쓰기 시작한 이름입니다. 예전에는 인사동이 명동 예술거리의 배후지역이라고 해요. 전성기에는 인사동에 종이를 다루는 지업사만 40여 곳이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1982년생인데 인사동 한지 가게 아들이다 보니 이 동네에서 많은 것을 지켜보며 자랐습니다.
계동에서 남산을 향해 바라본 도심(1982). 낙원상가를 중심으로 옛날 인사동 풍경이 보인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가 초등학교 다니던 80년대 후반, 동양한지는 조계사 옆에 있었어요. 매장도 지금의 2배쯤 됐죠. 한지를 배송하는 차량만 8대였어요. 한지 뜨는 장인을 따로 모셔 매장에서 한지를 생산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인사동 거리에서 바라본 동양한지 ⓒfrice
옛날 인사동 모습은 지금과 많이 달랐나요?
부친 말씀에 따르면, 1960년대 후반 인사동은 안국동에서부터 인사동으로 내려오는 길 가운데에 실개천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를 중심으로 골동품 매장이 있었죠. 아침이 되면 골동품을 수집한 리어카가 다녔다고 전해져요. 병풍을 수리하거나 족자를 꾸미는 표구사가 늘어나면서 부자재를 취급하는 필방, 지업사가 늘어났습니다. 그렇게 상권이 만들어지면서 ‘전통문화의 거리’가 된 거죠.
창완님의 기억에서 인사동은 어떤 풍경입니까?
제가 기억하는 건 ‘1990년대 인사동’입니다. 어린 시절 제 기억에도, 종로 골목에 리어카를 끌고 다니는 아저씨들이 엄청 많았습니다. 리어카에 실려있는 건 북촌이나 서촌의 한옥집에서 나온 물건들이었어요. 당시 토박이 주민이 집터를 허물고 새 집을 짓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런 집에서 벽지로 썼던 종이라거나 집 어딘가에 방치된 족자 같은 게 리어카에 실린 채 인사동을 떠도는 거죠.
리어카꾼이 "XX동에서 철거하다 나온 물건인데 필요하면 살래요?"라고 말을 붙이면서 인사동 가게를 돌아다녔어요. 그런 물건이 임자를 만나면 미술품이 되는 거였죠. 안목이 있는 분들은 거기서 문화재급 생활 도구를 건지기도 하셨어요.
"고서나 고미술품을 구하려면 인사동에 가야 한다"라는 소문 같은 게 생기고 실제로 인사동에서 그런 물건을 쥐고 계신 분들이 머무르는 거죠. 전통문화의 거리라는 인사동의 이미지는 당시 영향이 크지 않을까 싶어요. 지금은 임대료 문제도 있고 외국인 관광객 대상 상권이 되면서 떠나는 분들도 계시지만요.
말씀대로 인사동 거리를 걷다 보면, 예술거리보다는 관광지로 동네 역할이 바뀌고 있다는 걸 느낍니다.
시대의 흐름을 역행할 수는 없는 거죠. 한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통에 기반한 문화는 실생활과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고, 전통기술이 쓰이는 곳도 점점 사라지고 있거든요. 한지 가게도 많이 줄었어요.
ⓒfrice
#02. 한지란 무엇인가?
한지는 정확히 어떤 종이입니까?
한지는 ‘닥나무 섬유를 떠서 손으로 만든 종이’를 통칭합니다. 한지[韓紙]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건 1958년 '대한민국 통계연감'인데요. 그전에는 닥나무 저[楮]에 종이 지[紙]를 써서 '저지'라 불렀어요. 전통한지는 닥나무를 비롯한 종이용 나무가 자라면 따로 수확을 해요. 나무결을 손으로 벗겨내 잿물에 삶고, 섬유를 모아 그것을 방망이로 두들겼죠.
ⓒfrice
화학적으로 보면 닥나무 섬유를 '수소 결합'해서 만든 종이입니다. 산도가 적은 중성지고요. 중성지는 산성과 알칼리성을 띄는 일반 종이보다 수명이 길어요. 그래서 천년을 간다는 거죠. 원료인 닥나무의 생장 환경, 한지를 만드는 그 날의 날씨, 장인의 컨디션, 원료의 처리 과정 등의 조합을 거쳐 한 장의 한지가 태어납니다.
한지를 한국에서 만들어야만 한지인가요?
원칙적으로는 「한국에서 자란 닥나무 섬유를 원료로, 한국 고유의 초지 기법인 외발뜨기 기법을 사용하여, 장인이 만든 수제 종이」를 얘기해야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한지의 범위를 「사람이 닥나무 섬유를 초지 기법으로 만든 종이」로 보는 게 옳다고 봅니다. 지금은 기계로 만들거나 손으로 만든 한지의 구분이 없어져 있어서 고민이네요.
최근 2~3년 사이에 닥나무 재배와 수확이 어려워지고, 인력난이나 비용 증가로 전통방식이나 제작 환경을 지키기 힘들어졌죠. 현실적인 이유로 한지의 범위는 느슨해졌습니다. 오늘날 한지 업계에서는 수입산 닥나무를 사용해 한국에서 만드는 것도, 한국에서 만들지는 않아도 닥나무 섬유로 만든 종이도, 기계로 만드는 것도 다 한지라 부르고 있어요. 「닥나무 섬유를 이용한 종이」로 범위가 넓어진 거죠.
참고로 해외에서도 한지와 비슷한 물성을 지닌 전통 종이를 생산합니다. 일본에서는 화지(和紙), 중국은 선지(宣紙)라고 부르죠.
전통한지 제작을 위해 닥나무 겉껍질을 벗겨 건조하는 모습 ⓒ동양한지
특히 한. 중. 일 3국이 공통적으로 닥나무 섬유질로 종이를 만들어요. 종이 만드는 기술은 각 나라별 지역, 환경적 차이로 기법이 나뉘게 됐습니다. 제작 기법의 차이는 닥나무 섬유질 배열에 영향을 주는데요. 이것이 닥나무 섬유를 이용한 종이에 질적 차이를 나타냅니다. 한국 전통한지의 경우, 발틀에 턱을 없애고 닥나무 섬유가 사방으로 자유롭게 배열될 수 있는 방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박창완님이 한국 전통 외발뜨기하는 모습. 발틀에 턱이 없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동양한지
전통방식을 고증한 한지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전통한지는 제작 공정을 현대화시킨 한지와 비교하면 광택, 질감, 냄새 같은 게 더 좋아요. 한지 장인의 공방 같은 곳을 가면 그 집에서만 나는 나무냄새 같은 게 있거든요. 그런 자연스러움이 전통한지에 깃들어있어요. 한지 특유의 옅은 풀냄새는 사람 기분을 좋게 만들어요. 종이 자체가 뿜어내는 매력일 텐데요. 종이를 다루는 사람에게 마음의 안식을 줍니다. 그런 측면에서 저는 한지가 '쉼을 주는 종이'라고 생각합니다.
ⓒfrice
전문가 입장에서 볼 때, 가장 우수한 한지는 무엇인가요?
제 기준으로는 '미색 외발지'입니다. 오늘날 한지는 여러 가지 색을 지니고 있지만, 한지 속 섬유질이 파괴되지 않은 상태로, 닥나무가 지닌 색감을 드러내는 건 '미색'이라 생각합니다. ’외발지’는 외발뜨기라는 기법으로 만든 한지를 뜻해요. 종이를 뜰 때 닥나무 섬유를 넓게 펼치는 판을 '발'이라고 하는데요. 천장에 줄 하나만 매달아서 전후좌우로 흔들고, 풀려 있는 닥나무 섬유를 물에서 거르는 기법을 '외발뜨기'라 부릅니다.
미색 외발지를 쌓아 측면에서 바라봤다. 종이 모서리의 섬유질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아름답다. ⓒfrice
많은 분들이 「하얀색 한지가 좋은 한지냐?」라고 물어보세요. 표면이 깨끗하니 좋은 물건이라고 여기시는 거죠. 오히려 하얀색 한지는 약품 처리를 강하게 해야 하거든요. 결과적으로 닥나무 섬유질이 상하기 때문에 질 자체는 미색 한지보다 조금 떨어집니다.
동양한지에서 온 손님이 회화용 한지를 문의하는 모습. 어떤 목적으로 방문했는지 물었다. “저희는 고려대학교 한국화회 부원인데요. 동양화 그리기에 적합한 한지를 구하러 왔어요.” ⓒfrice
오늘날 한지는 '누가, 왜' 쓰는지 궁금합니다.
먼저 회화 분야에서는 꾸준히 사랑받고 있습니다. 한지는 기계로 만든 종이에 비해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지만, 한지만의 발색이 있기에 수요가 있습니다.
고려대학교 한국화회 부원에게 작품이 완성되면 따로 보여줄 수 있냐고 물으니 그들은 흔쾌히 제안에 응했다. 좌)<잉어가 처음 물살을 가른 그 순간! 날아오르다 너처럼> 우) <ODD GRAPE EYE>, 30cm*40cm, 순지에 채색 ⓒ신승혜
서양화가 류영신의 <Forest-Divine>추상화 연작. 한지의 닥나무 섬유를 소재로 자연의 생명력을 표현한다. ⓒADAGP
한지의 물성을 디자인에 활용하려는 수요도 있어요. 한지는 원료인 닥나무의 섬유를 *고해하는 시간에 따라, **물질을 어떻게 했는지에 따라서 서로 다른 질감이 나타납니다.
*고해 : 섬유를 풀어내는 작업 **물질: 한지를 만드는 공정 중 하나. 발 위에 있는 닥나무 섬유를 좌우로 흔드는 작업
2023년 북촌한지문화센터에 전시된 한지조명장치 ⓒstudio.sunnykim
닥나무 섬유가 구름 위를 떠다니는 용을 닮아서 '운용지雲龍紙'라 부른다. 동양한지는 운용지를 조명장치에 쓰기에 적합한 한지로 추천한다. ⓒfrice
조명 연출에 적합한 소재로는 ‘운용지(雲龍紙)’가 있어요. 섬유를 덜 갈아서 종이 속에 실타래 같은 게 떠있는 한지인데요. 종이를 빛에 비추었을 때 닥나무 섬유로 표현되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습니다. 유리창에 붙이면 햇빛을 가리는 용도로 적합한 한지도 있어요. 텍스처감이 몽글몽글한 '구름지'같은 한지를 고를 수 있겠습니다.
ⓒfrice
한지 테두리는 데클 엣지(Deckle edge)라 부르는 자연스러운 보풀이 있어요. 이처럼 한지의 물성을 다양한 목적을 갖고 활용하려는 분들이 한지를 들고 가서 실험하고 계십니다. 업계에 몸담으며 점점 한지의 위기를 실감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디자인적 실험이 참 소중한 흐름이라 생각해요.
인터뷰
인사동 동양한지
전통문화의 거리 인사동. 이곳에 디자이너가 따로 찾는 한지 가게가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가게 이름은 동양한지. 옛날 인사동 모습부터 오늘날 한지의 쓰임새까지 과거와 오늘을 넘나들며 다양한 이야기를 기록할 수 있었다.
동양한지 박창완님 ⓒfrice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한지를 연구하고 만들고 판매하는 박창완입니다. 경기도 김포에 한지 소재연구소를 만들었는데요. 염색이나 후가공을 거친 특수한지를 다양하게 생산하고 있어요. 저는 한지의 현대적인 쓸모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렇게 작업한 한지들은 인사동 동양한지에서 판매하고 있어요. 부친을 도와 남동생과 한지 가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01. 왜 인사동에 한지 가게가 몰려있을까?
부친께서 인사동 한지 전문가로 유명한 박성만 선생님이시죠.
맞습니다. 저는 교육학을 공부했어요. 대학원에서는 한지가 아니라 학생 인권을 공부했었죠.(웃음) 인사동에서 한지 가게를 운영하시던 부친께서 한지 업계로 들어오라고 저를 설득하셨습니다. 한지의 가치를 높이고 맥을 이을 사람이 절실하다고요.
동양한지에 전시된 한지공예품 샘플과 판매중인 종이들 ⓒfrice
2009년부터 한지를 공부하기 시작했는데요, 이를 위해 미술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국내 한지 장인을 만나 사례 분석과 제작 기법을 정리할 수 있었죠. 대학원에서 했던 학술 연구는 큰 힘이 됐습니다. 지금은 문화재 복원용 한지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인사동 동양한지는 50년 넘게 운영중입니다. 언제 어떻게 시작됐나요?
전주에서 할아버님이 일제강점기 때 한지를 만들어 파셨고, 부친께서는 유통에 힘쓰셨어요. 부친은 1968년에 서울 인사동으로 들어와 1972년부터 한지 가게를 여셨죠. 동양한지라는 이름은 그때부터 쓰기 시작한 이름입니다. 예전에는 인사동이 명동 예술거리의 배후지역이라고 해요. 전성기에는 인사동에 종이를 다루는 지업사만 40여 곳이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1982년생인데 인사동 한지 가게 아들이다 보니 이 동네에서 많은 것을 지켜보며 자랐습니다.
계동에서 남산을 향해 바라본 도심(1982). 낙원상가를 중심으로 옛날 인사동 풍경이 보인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가 초등학교 다니던 80년대 후반, 동양한지는 조계사 옆에 있었어요. 매장도 지금의 2배쯤 됐죠. 한지를 배송하는 차량만 8대였어요. 한지 뜨는 장인을 따로 모셔 매장에서 한지를 생산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인사동 거리에서 바라본 동양한지 ⓒfrice
옛날 인사동 모습은 지금과 많이 달랐나요?
부친 말씀에 따르면, 1960년대 후반 인사동은 안국동에서부터 인사동으로 내려오는 길 가운데에 실개천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를 중심으로 골동품 매장이 있었죠. 아침이 되면 골동품을 수집한 리어카가 다녔다고 전해져요. 병풍을 수리하거나 족자를 꾸미는 표구사가 늘어나면서 부자재를 취급하는 필방, 지업사가 늘어났습니다. 그렇게 상권이 만들어지면서 ‘전통문화의 거리’가 된 거죠.
창완님의 기억에서 인사동은 어떤 풍경입니까?
제가 기억하는 건 ‘1990년대 인사동’입니다. 어린 시절 제 기억에도, 종로 골목에 리어카를 끌고 다니는 아저씨들이 엄청 많았습니다. 리어카에 실려있는 건 북촌이나 서촌의 한옥집에서 나온 물건들이었어요. 당시 토박이 주민이 집터를 허물고 새 집을 짓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런 집에서 벽지로 썼던 종이라거나 집 어딘가에 방치된 족자 같은 게 리어카에 실린 채 인사동을 떠도는 거죠.
1975년 8월 서울 명동 서울은행 본점 앞을 지나는 리어카 꾼들 ⓒ공유마당
리어카꾼이 "XX동에서 철거하다 나온 물건인데 필요하면 살래요?"라고 말을 붙이면서 인사동 가게를 돌아다녔어요. 그런 물건이 임자를 만나면 미술품이 되는 거였죠. 안목이 있는 분들은 거기서 문화재급 생활 도구를 건지기도 하셨어요.
"고서나 고미술품을 구하려면 인사동에 가야 한다"라는 소문 같은 게 생기고 실제로 인사동에서 그런 물건을 쥐고 계신 분들이 머무르는 거죠. 전통문화의 거리라는 인사동의 이미지는 당시 영향이 크지 않을까 싶어요. 지금은 임대료 문제도 있고 외국인 관광객 대상 상권이 되면서 떠나는 분들도 계시지만요.
말씀대로 인사동 거리를 걷다 보면, 예술거리보다는 관광지로 동네 역할이 바뀌고 있다는 걸 느낍니다.
시대의 흐름을 역행할 수는 없는 거죠. 한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통에 기반한 문화는 실생활과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고, 전통기술이 쓰이는 곳도 점점 사라지고 있거든요. 한지 가게도 많이 줄었어요.
ⓒfrice
#02. 한지란 무엇인가?
한지는 정확히 어떤 종이입니까?
한지는 ‘닥나무 섬유를 떠서 손으로 만든 종이’를 통칭합니다. 한지[韓紙]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건 1958년 '대한민국 통계연감'인데요. 그전에는 닥나무 저[楮]에 종이 지[紙]를 써서 '저지'라 불렀어요. 전통한지는 닥나무를 비롯한 종이용 나무가 자라면 따로 수확을 해요. 나무결을 손으로 벗겨내 잿물에 삶고, 섬유를 모아 그것을 방망이로 두들겼죠.
ⓒfrice
화학적으로 보면 닥나무 섬유를 '수소 결합'해서 만든 종이입니다. 산도가 적은 중성지고요. 중성지는 산성과 알칼리성을 띄는 일반 종이보다 수명이 길어요. 그래서 천년을 간다는 거죠. 원료인 닥나무의 생장 환경, 한지를 만드는 그 날의 날씨, 장인의 컨디션, 원료의 처리 과정 등의 조합을 거쳐 한 장의 한지가 태어납니다.
한지를 한국에서 만들어야만 한지인가요?
원칙적으로는 「한국에서 자란 닥나무 섬유를 원료로, 한국 고유의 초지 기법인 외발뜨기 기법을 사용하여, 장인이 만든 수제 종이」를 얘기해야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한지의 범위를 「사람이 닥나무 섬유를 초지 기법으로 만든 종이」로 보는 게 옳다고 봅니다. 지금은 기계로 만들거나 손으로 만든 한지의 구분이 없어져 있어서 고민이네요.
최근 2~3년 사이에 닥나무 재배와 수확이 어려워지고, 인력난이나 비용 증가로 전통방식이나 제작 환경을 지키기 힘들어졌죠. 현실적인 이유로 한지의 범위는 느슨해졌습니다. 오늘날 한지 업계에서는 수입산 닥나무를 사용해 한국에서 만드는 것도, 한국에서 만들지는 않아도 닥나무 섬유로 만든 종이도, 기계로 만드는 것도 다 한지라 부르고 있어요. 「닥나무 섬유를 이용한 종이」로 범위가 넓어진 거죠.
참고로 해외에서도 한지와 비슷한 물성을 지닌 전통 종이를 생산합니다. 일본에서는 화지(和紙), 중국은 선지(宣紙)라고 부르죠.
전통한지 제작을 위해 닥나무 겉껍질을 벗겨 건조하는 모습 ⓒ동양한지
특히 한. 중. 일 3국이 공통적으로 닥나무 섬유질로 종이를 만들어요. 종이 만드는 기술은 각 나라별 지역, 환경적 차이로 기법이 나뉘게 됐습니다. 제작 기법의 차이는 닥나무 섬유질 배열에 영향을 주는데요. 이것이 닥나무 섬유를 이용한 종이에 질적 차이를 나타냅니다. 한국 전통한지의 경우, 발틀에 턱을 없애고 닥나무 섬유가 사방으로 자유롭게 배열될 수 있는 방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박창완님이 한국 전통 외발뜨기하는 모습. 발틀에 턱이 없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동양한지
전통방식을 고증한 한지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전통한지는 제작 공정을 현대화시킨 한지와 비교하면 광택, 질감, 냄새 같은 게 더 좋아요. 한지 장인의 공방 같은 곳을 가면 그 집에서만 나는 나무냄새 같은 게 있거든요. 그런 자연스러움이 전통한지에 깃들어있어요. 한지 특유의 옅은 풀냄새는 사람 기분을 좋게 만들어요. 종이 자체가 뿜어내는 매력일 텐데요. 종이를 다루는 사람에게 마음의 안식을 줍니다. 그런 측면에서 저는 한지가 '쉼을 주는 종이'라고 생각합니다.
ⓒfrice
전문가 입장에서 볼 때, 가장 우수한 한지는 무엇인가요?
제 기준으로는 '미색 외발지'입니다. 오늘날 한지는 여러 가지 색을 지니고 있지만, 한지 속 섬유질이 파괴되지 않은 상태로, 닥나무가 지닌 색감을 드러내는 건 '미색'이라 생각합니다. ’외발지’는 외발뜨기라는 기법으로 만든 한지를 뜻해요. 종이를 뜰 때 닥나무 섬유를 넓게 펼치는 판을 '발'이라고 하는데요. 천장에 줄 하나만 매달아서 전후좌우로 흔들고, 풀려 있는 닥나무 섬유를 물에서 거르는 기법을 '외발뜨기'라 부릅니다.
미색 외발지를 쌓아 측면에서 바라봤다. 종이 모서리의 섬유질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아름답다. ⓒfrice
많은 분들이 「하얀색 한지가 좋은 한지냐?」라고 물어보세요. 표면이 깨끗하니 좋은 물건이라고 여기시는 거죠. 오히려 하얀색 한지는 약품 처리를 강하게 해야 하거든요. 결과적으로 닥나무 섬유질이 상하기 때문에 질 자체는 미색 한지보다 조금 떨어집니다.
동양한지에서 온 손님이 회화용 한지를 문의하는 모습. 어떤 목적으로 방문했는지 물었다.
“저희는 고려대학교 한국화회 부원인데요. 동양화 그리기에 적합한 한지를 구하러 왔어요.” ⓒfrice
오늘날 한지는 '누가, 왜' 쓰는지 궁금합니다.
먼저 회화 분야에서는 꾸준히 사랑받고 있습니다. 한지는 기계로 만든 종이에 비해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지만, 한지만의 발색이 있기에 수요가 있습니다.
고려대학교 한국화회 부원에게 작품이 완성되면 따로 보여줄 수 있냐고 물으니 그들은 흔쾌히 제안에 응했다.
좌)<잉어가 처음 물살을 가른 그 순간! 날아오르다 너처럼> 우) <ODD GRAPE EYE>, 30cm*40cm, 순지에 채색 ⓒ신승혜
서양화가 류영신의 <Forest-Divine>추상화 연작. 한지의 닥나무 섬유를 소재로 자연의 생명력을 표현한다. ⓒADAGP
한지의 물성을 디자인에 활용하려는 수요도 있어요. 한지는 원료인 닥나무의 섬유를 *고해하는 시간에 따라, **물질을 어떻게 했는지에 따라서 서로 다른 질감이 나타납니다.
*고해 : 섬유를 풀어내는 작업
**물질: 한지를 만드는 공정 중 하나. 발 위에 있는 닥나무 섬유를 좌우로 흔드는 작업
2023년 북촌한지문화센터에 전시된 한지조명장치 ⓒstudio.sunnykim
닥나무 섬유가 구름 위를 떠다니는 용을 닮아서 '운용지雲龍紙'라 부른다. 동양한지는 운용지를 조명장치에 쓰기에 적합한 한지로 추천한다. ⓒfrice
조명 연출에 적합한 소재로는 ‘운용지(雲龍紙)’가 있어요. 섬유를 덜 갈아서 종이 속에 실타래 같은 게 떠있는 한지인데요. 종이를 빛에 비추었을 때 닥나무 섬유로 표현되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습니다. 유리창에 붙이면 햇빛을 가리는 용도로 적합한 한지도 있어요. 텍스처감이 몽글몽글한 '구름지'같은 한지를 고를 수 있겠습니다.
ⓒfrice
한지 테두리는 데클 엣지(Deckle edge)라 부르는 자연스러운 보풀이 있어요. 이처럼 한지의 물성을 다양한 목적을 갖고 활용하려는 분들이 한지를 들고 가서 실험하고 계십니다. 업계에 몸담으며 점점 한지의 위기를 실감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디자인적 실험이 참 소중한 흐름이라 생각해요.
(…2부에서 계속…)
😈 동양한지는 취재하러 갔던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추천받아서 알게 됐어요. 한지가 필요하면 동양한지를 간다는 말씀이 인상 깊었죠. 인사동의 수많은 종이 가게 중 디자이너가 관심을 갖고 들르는 곳이라면 뭔가 특별한 게 있을 거란 짐작이 들었습니다.
인사동의 옛 모습부터 한지에 대한 전문가 지식까지 유익한 정보를 채집할 수 있었는데요. ‘한국의 종이’ 한지, 여러분은 얼마나 알고 계시나요?
사진 한창환
장소 인사동 동양한지